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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향 예산의 이야기
자비화
2023. 5. 19. 22:40
우리 고향 예산의 이야기(오성장학회)
우리 고향 예산은 호서지방에 위치한 고을로 예로부터 문물과 교통의 중심지로 찬란한 문화가 발전을 해온 곳이다. 고산(孤山), 오산(烏山)이라고 부른 예산과 금물(今勿), 덕풍(德豐)이라 부른 덕산, 그리고 임존성(任存城)이라 옛 이름을 지닌 대흥을 합하여 예산군이 되었다. 우리 고향 예산은 동쪽에는 차령산맥(車嶺山脈)이, 서북쪽에는 가야산(伽倻山脈) 뻗어내려 고울을 이루고 무한천(無限川), 삽교천(揷橋川)이 중앙을 흘려 내리고 기름진 평야를 형성한 내포평야(內浦平野:예당평야)가 이루며 임야가 높지 않고 구릉지(丘陵地)를 형성하여 과수원이 많다. 이처럼 예산은 역사가 깊고 아름다운 고장이라하여 역사를 건너다 보면 우리 고장에서 배출한 수 많은 인물과 만날 수 있으니 “땅과 사람이 서로 만나 빛난다(地人相得)”는 옛 사람의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차령산맥과 가야산맥의 박봉산, 봉수산(鳳首山)과 가야산, 덕숭산 등 어느 곳을 가든 조상들의 땀이 배인 숨결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고향 예산의 인맥(人脈)과 지맥(地脈)은 나라를 걱정하는 충(忠) 부모를 공경하는 효(孝) 친구를 사랑하는 의(義) 집안을 걱정하는 정렬(貞烈)등은 우리고장에서 예로 부터 전해오는 맥(脈)이요 정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산을 일컬어 ‘충절(忠節)의 고장’이라고도 하고 ‘효열(孝烈)의 고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수많은 명현을 배출했다하여 문향(文鄕)의 고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높지 않은 산과 급하게 흐르지 않는 냇물이 있고 그 곳에 큰 평야가 있는 곳, 이 고장이 우리 고향 예산이다. 여기를 가르쳐 조선시대에는 내포오읍(內浦五邑)이라 했다. 인물이 많이 나고 재주 있는 사람이 많으며 마음의 여유가 선비들이 많이 나서 나라를 융성케 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고장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산사람들은 불의(不義)가 있으면 항거(抗拒)하고 서로 간에 시기(猜忌)하지 않으며 부모에 순종(順從)하며 거역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예산을 복된 고장이 되게 한 조상들이 물려준 슬기이자 생활 지혜이다. 충절로 드높은 우리 고향 예산 BC 108년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내포지역에 형성되어 있는 진번국(眞番國)인 우리고향을 침공하여 진번군으로 칭하고 통치하며 식민지화 했으나 부족민들의 저항에 못이겨 급기야 25년만에 철수하고 말았다. 이것은 현재까지 흐르고 있는 예산인의 나라에 대한 충성과 자주정신의 맥이라 할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부여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납치되자 주유성(周留城)에 있던 왕족 복신(福信)은 임존성에 있던 스님 도침(道琛),흑치상지등과 결합하여 백제부흥을 약속하고 예산을 중심으로 임존성을 새 거점으로 하면서 군세를 크게 떨쳤다. 복신등은 백제유민 3만여명을 이끌고 도성 유인원(劉仁願)을 포위 공략한 것을 비롯하여 200여성을 수복하는 등 나당연합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에 나당군은 백제부흥군의 내분을 일으켜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왕자 풍은 복신을 살해하여 이에 부흥군에 사기가 떨어진 틈을 타 정복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임존성은 현재까지도 남아서 백제 유민 기상과 정기를 전해 주고 있다. 또한 우리 고향에서 후에 신라군이 당나라군을 몰아내는 싸움을 무한산성(無限山城)에서 전개하여 승리하니 이것 또한 외세를 물리치고 민족자주성을 지킨 고장의 얼이기도 하다. 한말에는 일제에 침탈되어 가는 국운을 구하고자 분연히 일어난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 또한 예산인의 우국충정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일제 강압에 못 이겨 을사보호조약을 맺게되자 일기 시작한 충청도 유림 의병들의 열기가 1906년 충청도 중서부인 우리 고향 예산을 비롯하여 각지로 퍼지게 되었다. 면암 최익현 선생과 고당 이남규선생등이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일기 시작한 의병의 열기는 마침내 홍주 의병 활동의 계기로 한말 의병의 봉화를 올렸다. 우리 고향이 출신은 아니지만 최익현 선생은 민종식 선생을 홍주 의병의 맹주로 삼아 의진(義陳)의 권위를 충의(忠義)로 인정하는 존양토복기(尊壤討復旗)와 장군검을 대흥 봉수산에서 수여하니 백여 유림의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조국을 짓밟고 중국대륙을 잠식하려던 시대에도 우리 고향의 선열들은 애국의 끈을 놓지 않았다. 특히 살신성인(殺身成仁) 한 조각 붉은 정신으로 조국의 자주 독립을 염원하면서 상해 홍구 공원에서 정의의 폭탄을 던진 매헌 윤봉길의사의 애국정신은 대한의 정기가 살아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린 쾌거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일우(日宇) 김한종 의사, 춘암 박인호 선생, 일연(一鳶) 신현상 선생 등 우리 고향의 많은 독립 투사들이 조국 광복을 위하여 싸워온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고향의 숭고한 맥으로 면면히 이어 내리고 있다. ‘양반의 고장’으로 수 많은 학자도 배출해 문향이요 선비의 고장, 양반의 고장으로 알려진 우리고향은 전통적으로 명신(名臣),공신(公臣),문신(文臣),학자(學者),문장(文章),필묵(筆墨)의 명현 등이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우리 고향에서 두드러지게 뛰어난 명현을 본다면 백제시대의 흑치상지를 먼저 들을 수 있으며 고려때에는 응렬공 강민첨, 한문준, 도웅 그리고 조선시대와서는 자암 김구, 이목, 이약수, 아계 이산해, 이산보, 신계영, 이경전, 이담, 이흡, 조극선, 성흔, 성수침, 이만, 이의배, 이명준, 박두세, 이여발, 조사적, 윤봉구, 윤봉오, 권빈, 이덕성, 조태구, 정만석, 이가환, 이사환, 김흥경, 이해우, 김노경, 김정희, 성수묵, 김문제, 이명규, 최익현, 송만경 등을 들 수 있다. 문학으로는 한문준을 비롯하여 화전별곡(花田別曲)등의 시가로 남긴 자암 김구등 선조때 8대 문장가인 아계 이산해, 田園四時歌를 남긴 선석 신계영, 시문에 능했던 포저 조익,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로 유명한 동암 박두세, 배일사상(排日思想)을 문학적 문장으로 엮었다는 소장(疏章)과 소양처자전(小陽處子傳)을 남긴 이남규등을 들 수 있다. 학자로는 대부분이 성리학자로 이담, 이흡, 조극선, 조익, 성흔, 윤봉구, 윤봉오, 이덕성 등이 유명하다. 우리고향이 묵향이라고도 불리우는 이유는 자암 김구의 인수체(仁壽體)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秋史體)가 우리 고향의 선열의 예에서 났기 때문이다. 종황의 서체를 배워 예산 서도의 서두를 장식한 자암 김구의 인수체나 각고의 노력 끝에 서도에 있어 추사체를 완성하고 독자 일문을 열어 나가 최고의 경지에 이른 김정희 선생 등의 자기 류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은 예산인의 은근과 끈기를 대변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초등학교 어린이의 교과서에 ‘의좋은 형제로’ 대변되는 이성만 형제의 우애와 많은 곳에 세워져 있는 효자,효부,열녀의 행실을 기록하여 주는 각은 선비의 고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우리 고향의 당연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가 가꾸고 지켜야 할 일들 현재 예산군은 총면적 542.31Km2에 개략 36,476세대, 88,000명이 살고 있다. 예당저수지, 덕산온천, 충의사, 가야산 도립공원 추사고택 등 천혜의 관광지가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조선 말기에 예덕상무사를 본거지로 하는 보부상이 있으면서 내포지역의 충남 서부의 상권을 장악했던 곳이다. 또한 충남 서부의 교통 중심지로 농삿물과 수산물, 공산물의 매매가 이루어져 상업도시로 성장했으며 이곳 출신의 인사들은 전국에서 두 번째 충청도에서는 최초로 호서은행을 설립하였음(1912년에 兪鎭相, 兪鎭泰, 成樂奎, 成樂憲, 崔奎錫, 李基升, 金鎭燮, 咸台永 등이 人口가 萬도 안 되는 예산에 湖西銀行을 설립하니 이는 내포에 싹튼 최초의 민족 자본이었다. 1930년에 申鉉商은 湖西銀行돈 4만 8천 원을 독립운동 단체에 전하려 한 사건이 있었으니. 강산에 서리는 正氣! 내포에서 더욱 빛난다.) “예산가서는 옷 잘 입는 체 하지 말고, 홍성가서는 말 잘 하는 체 하지 말라”아직까지 충남 서부지역에 떠 도는 이 익살은 1930년대 이곳이 충남 경제의 중심지로 도내에서 가장 부유한 군이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19010년 일본 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 각 부군 시장현황조사’라는 자료에 의하면 인구 10만명이며 도청소재지였던 공주의 연간 거래액이 26만6백원이었는데 인구 1만명이던 예산의 그것은 44만원에 달해 이곳이 충남 경제를 주름잡고 있던 곳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순탄하고 기름진 땅에서 훌륭한 인물이 배출된다는 말도 그대로 확인되는 우리 고향 예산! 산좋고 물좋고 정자 좋다는 말이 있다. 가야산과 차령산맥의 기세를 생각하며 수덕사 향천사 등의 아름다운 절에서도 유유히 흐르며 기름진 평야를 만들어 주는 예당저수지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산천 경개가 아름답고 인정이 넘치는 곳을 고향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더욱 풍요롭고 아름다운 고향으로 지키고 가꾸는데 온 정성을 다하여 보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우리 고향을 후세에 전해 줘야 할 것이다.(오성장학회) |